72세 정옥심 할머니의 한글깨치기  

11일 낮 12시 30분.
초인종이 울리고 한글교육 학습지의 방문교사인 이정환씨(여·웅진씽크빅)가 현관으로 들어선다.
공부방 컴퓨터 책상 위에 책이 펼쳐지면 72세의 정옥심 할머니(경기 용인시 금화마을)는 가슴을 부여잡는다.
“매번 보는 선생님인데도 공부할 생각만 하면 떨려.
오늘은 옆에서 누가 본다고 하니 더 떨린다고.”

● 유아용 학습지로 시작한 한글공부이날은 매주 한 번 있는 정 할머니의 한글 수업날.
정 할머니는 지난해 8월부터 다섯 살배기 손녀 정하가 배우는 웅진의 ‘한글깨치기’ 프로그램으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할머니.
받아쓰기 하시는 공책 어디 갔어요?”“여기.
먼저는 선생님이 숙제를 안 써놓고 가서 이번엔 내가 그냥 썼어요.”칼 가위 등 수업 준비물을 잠깐 챙긴 뒤 수업은 시작됐다.
오늘 읽을 이야기 제목은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
“나는 깨…서.”“커서.”교사 이씨가 얼른 바로 잡는다.
“물…명(무엇·이하 괄호 안은 교사 이씨가 바로잡는 말).
무엇이 될까.
욕(용감), 용감한 손, 속(소), 소방관이 되어야지.
높, 높은 곳에…올라 자(가), 가, 물, 불을 깨(꺼), 꺼요.”‘커’와 ‘꺼’가 모두 할머니 입에서는 ‘깨’로 발음된다.
30분 남짓한 수업시간 내내 할머니는 이 발음을 헷갈려 했다.
“아…(픈), 아픈 사람을.”초등학교 2학년인 손자 연하가 집에 돌아왔다.
“연하 왔니?” 한 마디만 하고 할머니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아이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바닥에 앉아 구슬치기 놀이를 하다가 10분 뒤 학원에 간다며 가방을 챙겨들고 나섰다.
“망(병), 병원으로 올, 옴겨요.
두캐(꺼) 꺼운 김…, 신…,(장) 장갑을 끼이고 긴 장,관(화) 장화를 개, 신(신어요), 신어요.”단어학습을 마치고 문장수업에 들어간 지 4개월여가 됐지만 여전히 받침이 여러 개인 단어읽기는 어렵다.
정 할머니는 특히 ‘옮기다’는 단어의 ‘ㄹ’과 ‘ㅁ’을 신경 써서 차례차례 고스란히 발음했다.
거실 벽에는 ㄱ, ㄴ, ㄷ 등 한글 자모음과 1부터 100까지의 숫자가 붙어있다.
“처음에 정하 보라고 붙였는데 정하는 이제 다 아는데 나는 쉽사리 잊어버리고…”라며 정 할머니는 안타까워했다.
정하는 걸핏하면 “할머니 이거 뭐하러 공부해.
나하고 놀자”라며 할머니가 들여다보고 있는 책을 덮어버리곤 한다.
“여기 그림은 뭐예요?”이야기 읽기가 끝나자 그림을 보면서 단어를 맞히는 페이지를 펼쳐놓고 이 교사가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켰다.
“오, 요리가…와 마…만화가.”“그럼 여기서 일을 하는 사람은요?”“운, 정, 사….”“예, 운전사.
잘 하셨어요.”유아용 학습지이므로 보통은 각각의 직업이 하는 일을 설명해줘야 하지만 할머니는 읽기 중심이다.
할머니에게 커서 될 ‘무엇’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게다.
정 할머니는 1931년 충남 덕산에서 태어났다.
3남3녀 가운데 넷째였던 할머니는 남자 형제들과 달리 ‘자식들 운동회 때 가 본 것 말고는’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평생 글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거리 이외에는 외출도 함부로 못했다.
외출했다가 집이 있는 아파트로 돌아올 때는 남들이 엘리베이터 숫자를 누르는 걸 눈여겨 봐뒀다가 그대로 따라하곤 했다.
숫자를 몰랐기 때문에 버스도 혼자서 타지 못했고, 평생 전화도 걸어보지 않았다.
요즘은 숫자를 어느 정도 익혀서 아는 사람 집에 전화를 한 번 걸어봤는데 사람이 없는지 받지 않았다.

● 남편의 핀잔, 며느리의 지지할머니가 한글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그냥 배우고 싶어서’다.
다른 사람들이 책 들여다보는 게 부럽기도 했고, 일하는 며느리 대신 집에서 손자 손녀에게 글도 가르쳐 주고 싶었다.
함께 사는 막내아들과 며느리가 할머니의 공부를 지지하고 나섰다.
“나는 정(씩) 씩씩한 등, 한(반) 등반가 오, 요…예요.
두깨(꺼) 꺼운 옷을 염(입) 입고.
아이, 저기.
내가 안경 써야겠네.”평생 쓰지 않았던 안경을 정 할머니는 최근 마련했다.
글을 자꾸 읽다보니 눈이 침침해졌던 것.
안경을 쓴 이후로는 발음이 훨씬 유연해졌다.
“높은 산에 올, 라, 가, 요.”“아유, 잘 읽으셨어요.
옷을 보니까 얇은 옷이 아니라 어떤 옷을 입었어요, 할머님?”“두…두꺼운 옷을 이…버요.”정 할머니는 예습 복습을 열심히 한다.
빨래하다가도, 청소하다가도 이번 주에 배웠던 내용을 골똘히 떠올린다.
막상 책을 들여다보면 글자와 발음이 생각나지만 기억에 의존해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나이 먹어서 공부하면 안 돼요.
그저 철없을 적에 배워야 배우는 거다는 생각이 들지.
너무 모르니까 좀, 슬픈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은 총명해서 한문 같은 거든 뭐든 갈쳐(가르쳐)주면 잘 아는데 내는 안 돼요.
머리가 굳으니께로….
부끄러워서 아(이)들한테 봐 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고, 할아버지(남편)도 물으면 ‘뭐 하러 배우느냐’며 소리 빽빽 지르고.
선생이 와서 갈쳐주면 내 혼자서 딜다(들여다) 보고, 암만 딜다 봐도 모르겠는 거는 선생님 오면 갈쳐줘요.”강원도 사투리가 약간 섞인 말투로 정 할머니는 늦깎이 공부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처음 단어를 배울 때 할머니는 무조건 외웠다.
‘가’자에 ‘ㄱ’하면 ‘각’하는 식으로 정공법을 썼다.
글자를 붙여놓고 들여다 보기를 수 차례.
평생 한 번 써보는 게 소원이었던 ‘정옥심’ 이름 세 글자는 단박에 외워버렸고,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의 이름도 줄줄 쓰게 됐다.
이 교사는 “할머니의 학습속도가 무척 빠르다”며 칭찬했다.
거실 소파에는 늘 동화책이 한 권 펼쳐져 있다.
정 할머니가 손자들이 읽는 동화책을 가져다 보곤 하는 것.
방문교사가 내주는 단어쓰기 숙제는 늘 ‘넘치게’ 한다.
11일에는 ‘닦다’ ‘친절’ ‘운전사’ ‘목수’ ‘화가’ ‘무용수’ ‘경찰관’ ‘멋지다’ ‘더럽다’ ‘두껍다’ ‘우체국’ ‘환경미화원’ 등 20여개의 단어가 공책에 적혔다.
숙제를 다 하고 나면 정 할머니는 동화책의 내용을 옮겨 적는다.
이틀에 30분씩 할머니는 이런 식으로 ‘자율학습’을 한다.
이제 곧 한글깨치기 과정이 끝나지만 할머니는 계속 공부하고 싶다.
“며느리 보기도 민망하고, 배워도 잘 하지 못해 소용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것은 속마음과는 다른 표현일 뿐이다.
교사가 “요즘 들어 특히 많이 느셨어요”하면 “늘었어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며느리는 이미 방문교사 이씨에게 “어머님이 원하신다면 반복학습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부를 계속 맡아주시라”고 부탁해 두었다.
“나이 많은 내가 이제 배워서 뭣하려고 일케(이렇게) 자꾸 배우려고 하는지….
그래도 내 생일 때 아들 며느리한테 편지도 쓰고 싶고, 손주한테 동화책도 읽어주고 싶지.
[동아일보]

*** 우리의 어머니에게 배움의 한을 남겨드리지 마십시다***